남평양(南平壤)은 고구려 때에 지금의 서울을 이르던 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잡지의 기사, 이곳에 보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에서 성장하다가 충돌하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치양(稚壤-남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고구려는 4세기말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사업의 성공으로 한강선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 무렵 양주지역에는 남평양이라고도 한 북한산군과 함께 훗날 견주로 개명되니 매성현(買省縣) 및 내을매현(內乙買縣)등이 설치 되었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평양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 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고 본래는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도 남쪽에 있는 서울이라 하여 남평양이라 불렀고 신라 진흥왕때도 한주라하여 중요시 했으며 고려 숙종때는 남쪽에 있는서울이라 하여 남경이라고 불렀다.
남평양(南平壤)은 고구려 때에 지금의 서울을 이르던 말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잡지의 기사, 이곳에 보면,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도읍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는 대륙과 한반도에서 성장하다가 충돌하는데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치양(稚壤-남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고구려는 4세기말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사업의 성공으로 한강선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 무렵 양주지역에는 남평양이라고도 한 북한산군과 함께 훗날 견주로 개명되니 매성현(買省縣) 및 내을매현(內乙買縣)등이 설치 되었다. 광개토왕이 뺏은 고구려 한성이 본래는 백제 온조왕이 마한(馬韓)에게서 뺏은 평양이었고, 그래서 고구려 남평양, 혹은 하평양(下平壤; 광개토왕비문)이라고도 했고 본래는 근초고왕의 수도 한산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도 남쪽에 있는 서울이라 하여 남평양이라 불렀고 신라 진흥왕때도 한주라하여 중요시 했으며 고려 숙종때는 남쪽에 있는서울이라 하여 남경이라고 불렀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의 남진이 저지되고 이후에는 양국이 공격의 주도권을 잡아 신라가 죽령 이북의 10군을 빼앗고, 백제가 한성 및 남평양 등 6군을 수복하여 잠시 호각세(互角勢)를 유지하기도 하였다.